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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도서] "여행의 이유 - 김영하" 독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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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팅은 책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여행의이유

 

[도서정보]

발행일 : 2019.04.17

출판 : 문학동네

장르 : 에세이

책소개 :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여행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설가 김영하의 매혹적인 이야기 "여행의 이유"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던 저자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순간부터 최근의 여행까지 자신의 모든 여행의 경험을 담아 써내려간 아홉 개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나온 삶에서 글쓰기와 여행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온 저자는 여행이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녀썬 것인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여행의 이유를 찾아가며 그 답을 알아가고자 한다.

2005년, 집필을 위한 중국 체류 계획을 세우고 중국으로 떠났으나 입국 거부당하고 추방당했던 일화로 시작해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추방과 멀미', 이상과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피로로부터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에 관해 다룬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즐겁고 유쾌하게만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면하변서 하게 된 독특한 여행에 대한 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등의 이야기를 통해 매순간 여행을 소망하는 여행자의 삶. 여행의 의미에 대해 함꼐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소개]

김영하

196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잠실의 신천중학교와 잠실고등학료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한번도 자신이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0년대 초에 PC통신 하이텔에 올린 짤막한 콩트들이 뜨거운 반응을 얻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꼐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책 구절 기록하기]

<추방과 멀미>

# 한 연구에 따르면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은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영역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아무리 자의로 주는 돈이라 해도 빼았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신용카드는 내 지갑에서 나와 잠깐 상대방에게 건너가지만 곧 되돌아온다. 현금은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 우리가 상상하던 베이징대학 기숙사의 모습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마오쩌둥의 초상화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차를 끓여 우리에게 대접하면서 우리와 함께 그 지도를 보았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자기의 꿈은 미국으로 유학가는 것이라고, 자기뿐 아니라 많은 중국의 대학생들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며, 토플 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후배와 나는 토플 같은 것은 공부해본 적 없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으로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라 믿었고,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생각해 미워했기 떄문이었다.

# 기대와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떄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면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마치 앙케이트 조사와 비슷하다.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보면 인물에 대해 좀더 뚜렷한 윤과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은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서우치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 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떄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떄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 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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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현재>

#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 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 구글은 전 세계 유명 미술관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오래전부터 운영 중이다. 직접 가지 않는 다는 점만 뺴면 모든 면에서 현장에서 감상하는 것보다 낫다. 다리도 아프지 않고, 티켓 값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떠난다. 가서 거기 있고 싶어하고 직접 내 몸으로 느끼고 싶어한다.

#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 활발해지고 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이 프로그램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처음 메일로 제안 받았을 때는 여러 방면의 지식인들이 모여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막상 담당 프로듀서를 만나 처음으로 받았던 질문은 '여행을 좋아하세요?' 였다.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지만, 언제나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결국은 미적지근한 대답을 내놓게 되는 질문이 바로 이것. '여행을 좋아하세요?' 였다. 매년, 때로는 한 해에도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나온 게 벌써 이십 년이 넘었고,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규정되는 존재이니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분명 여행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행 없이는 못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질문을 받으면 늘 망설이게 된다. 담배를 피울 때도 그랬다. 하루에 한 갑 이상씩 피웠지만 누군가 '담배 좋아하시나봐요' 라고 물을 때면 늘 주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여행은 일종의 중독인가? 그럴 수도 있다. 알쓸신잡은 여행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은 다른 도시로 간다. 그리고 돌아온다. 가기는 함꼐 가지만 도시에 도착하면 흩어져 개별적인 여행을 한다. 저녁에는 식당에 모여 대화를 한다. 모든 대화가 그렇듯이 이 대화들은 가지를 치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기도 한다. 우리는 밤늦게 혹은 다음날 아침에 서울로 돌아온다. 함께 떠났던 이들이 각자의 여행을 하고 저녁에 만나 대화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이 여행의 이상함은 출연자와 제작진, 시청자가 이 여행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있다.

# 이 여행이 매우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완성된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매주 금요일 밤이었다. 그전까지 나의 모든 여행은 확고하게 일인칭이었다.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셰를 샀지만 막상 자기가 운전을 해보니 포르셰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더라. 그래서 친구에게 포르셰를 운전하라고 시킨 뒤 택시를 타고 따라갔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가 택시 기사에세 저기 가는 저 포르셰가 자기 차라며 정말 멋지지 않느냐며 자랑을 하자, 택시 기사는 어이없어하며 그런데 왜 택시를 탔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보 아니세요? 내 차에 타면 포르셰가 안보이잖아요?"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운전자는 일인칭이다. 자동차는 그렇게 설계돼 있다. 운전을 하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멋진 곳에 가서 놀라운 것을 경험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인칭의 경험이다. 그런 아쉬움 떄문에 셀카를 찍어보지만 셀카는 기본적으로 일인칭의 거울상으로 나타난다. 내가 렌즈를 보면 렌즈가 나를 찍는 것은 완벽한 삼인칭이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알쓸신잡' 같은 여행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되면 나는 '여행을 하는 나'를 삼인칭 시점으로 보게 된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를 찍기 떄문에 그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 카프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느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 아니 그 목적지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조차 모른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태도는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어차피 알 수 없다는 것. 많은 것들이 그저 우연으로 결정된다는 것. 이런 태도로는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는 충동은 줄일 수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방송을 오래하는 전문적인 방송인들도 두 유형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한 부류는 어떻게든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이다. 자신의 노력과 결과 사이에서 작은 인과관계라도 찾아내면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더 잘 통제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인류가 선택해온 길이다. 합리성을 믿고, 과학적 진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바로 근대성이다. 또 다른 부류는 바로 무조건적 믿음에 의탁하는 이들이다. 유능하고 신망이 있는 프로듀서와 그 팀을 믿는 것이다. '아무개 피디라면 믿을 수 있어' 라는 말을 나는 자주 들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인간들을 지배하던 태도, 다시 말해 절대적 믿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두가지 면이 다 있었다. 때로는 예측을 통해 결과를 통제하고 싶기도 했고 그냥 제작진을 전적으로 믿어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나는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의 입장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다.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떄문이다. 

# 우리는 흔히 어떤 곳을 여행하고 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그 도시의 전부를 속속들이 다녀온 것은 아니다. 설령 그 도시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그 도시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지역은 아주 한정돼 있다. 그런데도 외국인이 서울에 대해 물으면 마치 서울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세한다. 때로는 서울에 대해 책을 읽은 외국인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총체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알고 있을 때가 많다. 오히려 나는 서울에 대한 책을 거의 읽지 않기 떄문이다. 바야르의 말처럼 우리는 간접적으로 타자를 통해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을 경험한다. '알쓸신잡'은 이중, 삼중으로 탈여행을 수행한다. 제작진들은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출연자들의 행적을 종합할 수 이썼다. 나 역시 현장에서는 이야기로만 들은 다른 출연자들의 여행을 몇 주 후에나 영상으로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바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누구보다 이 여행을 가장 총체적으로 체험하는 이는 자기 집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시청자들이다 .

#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 누구든 받아들여졌다. 노숙자, 실업자, 성소수자, 공산주의자와 음모론자가 한 자리에서 담배를 나눠피우며 어울렸다. 나와 같은 여행자들만이 예외였다. 그들은 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피자를 얻어먹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게 전부였다. 골판지에 주장을 적어 들고 있거나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다. 모두가 동등하고 모두가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은 그곳에 '그림자'를 갖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였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세금을 내고 그 나라의 운명에 자기와 자기 가족의 미래가 걸려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문제였다. 나와 같은 여행자는 떠나면 그 뿐이었다. 여행자는 관찰하고 기록하고 때로는 일시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떠나간다.

# 만약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함꼐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즉, 그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쓰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잃고 나면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들. 그 그림자를 소중히 여겨라. 하지만 만약 그것을 잃었다면 그리고 회복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면 남은 운명은 방랑자가 되는 것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굳이 그림자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소설의 결말을 다시 읽어보면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돈이 그림자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꺠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이 그를 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끌어냈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으로 돌아갔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진입한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뉴욕타임스에 '저 끝 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인류가 지구의 승객이라는 비유는 지금으로서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당시에는 읽자마자 무릎을 칠 만한 것이었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매클리시는 이어서 우주의 이 끝 모를 차가움 속에서 우리 자신들은 형제, 서로가 형제임을 진실로 아는 형제라고 부연했다. 지구가 고작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구슬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떄 시인은 자존심을 다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에 지구라는 작은 행성, 푸르게 빛나는 우주의 오아시스와 우리 서로를 모든 동식물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다.

#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지가 버스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떄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이 나리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게 여행이다.

 

<노바디의 여행>

#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자, 노바디일 뿐이다.

# 여행자는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그 도시의 정주민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맞춘다. 때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썸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실뱅 태송의 표현대로 여행이 정말 일종의 습격이라면 여행자들의 이런 선택은 원주민의 힘과 위계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여행자를 반기지 않고 심지어 공격할 수도 있는 오만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도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면 여행자는 자신을 최대한 감추며 드러내지 않고자 할 것이다. 반면 현지인 상당수가 관광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여행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친절한 도시에는 우리는 굳이 자신을 현지인으로 가장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 도시의 원주민들이 우리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강력한 호감까지 갖고 있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여행지에서는 그저 이런저런 범주에 따라 분류될 뿐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고향에서 받는 대접을 요구하고픈 유혹을 느꼈고 실제로 실행에도 옮긴다. 그러나 원하던 것을 얻기는 쉽지 않다. 현지인들은 여행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곧 떠날 것이며 잊혀질 것이다. 오히려 여행자에게 너무 큰 관심을 갖는 현지인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뜻이고 그 필요가 너무 절박하면 그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강탈하려 할 것이다. 이른바 '예의바른 무관심' 정도가 현지인과 여행자 사이에는 적당하다. 

#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여행으로 돌아가다>

#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돌아올 곳,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 집과 내 물건이 있는 곳은 여정이 끝날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의 원점, 여행이 실패하거나 큰 곤란을 겪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 그곳에서 우리는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사이족의 청년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히려 고향이 유동적이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캠브리지대학교는 수백 년 동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청년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어디론가 옮겨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곳. 그의 부족은 늘 이동중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삶인 이들에게 여행은 과연 무엇일까?

# 여행 역시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움직이지만 이주나 피난과는 다르다. 여행은 자기 결정으로 한다. 자기 결정은 통제력과 관련이 있다. 여행은 이주와 달리 전 과정을 계획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 비행기와 호텔, 렌터카를 예약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진행된다. 예산과 일정에 맞춰 가야 할 곳을 내가 정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하는 이주자와 자기 결정에 따라 여행하는 자가 보는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것은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명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 우리는 한 도시의 핵심으로 돌진한다. 변두의 단조로운 주택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잠깐 맛볼 수는 있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는 도시의 정수만을 원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핀다. 현지인들은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건물과 거리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댄다. 여행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말>

# 나에게 녀석들은 반려가 아니라 여행자에 가깝다. 새미와 이슬이도 방울이도 깐돌이도 잠시 우리집에 왔다가 떠났거나 떠날 것이다. 긴 여행을 하다보면 짧은 구간들을 함께하는 동행이 생긴다. 며칠 동안 함께 움직이다가 어떤 이는 먼저 떠났고 어떤 이는 방향이 달라 다른 길로 간다. 때로는 내가 먼저 귀국하기도 한다. 그렇게 헤어져 영영 안 만나게 되는 이도 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대하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게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감상문]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현실에서 아주 잠시나마 도피하면서 리프레시할 수 있어서... 여행이 있어서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보상 같은 느낌이랄까? 모두가 비슷한 이유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작가가 이렇게 표현한 부분이 좋았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라고, 괜히 글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평소와 다른 옷이나 경험을 눈치보지 않고 노바디가 되어 할 수 있는 점. 특별히 여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적 없는데 하나하나 다 공감되는 이유들이다. 낯선 해외에서 받은 환대를 나 역시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여행의 순기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사실 나는 지금 인천공항으로 코로나 이후 처음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다. 즐거운 여행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여행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여행의 설레임을 다시 찾아줌 고마운 책이다.

 

[생각 나누기]

1. 당신에게 여행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새로운 경험, 음식 등을 통한 리프레시로 또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2. 타지에서 노바디가 되어 타인의 환대와 친절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대학생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기차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에게 길을 안내해주었는데 본인이 학창시절 한국어를 배웠다면서 한국어로 설명해주고, 숙소까지 안내해줬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당시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외국인이 사용하는 한국어도 반가웠고 친절했던 기억에 첫번째 해외 여행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또 스위스에서 크게 타박상을 당해서 무릎에 피가 나고, 바지가 찢어질 정도로 다친 적이 있는데 안내소 직원이 병원까지 차로 데려다준 적도 있다. 이런 따뜻한 기억들이 또 다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두렵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

 

3. 여행을 온 타인에게 받은 환대를 돌려준 적이 있나요? 환대의 순환을 실천해보세요.

생각해보면 위의 2번처럼 나는 낯선 곳에서 타인의 환대와 친절을 받았는데 나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질문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요즘 모바일 어플들이 워낙 잘 되 있어서... 라고 합리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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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김영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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